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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 안확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08-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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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 안확(安廓, 1886~1946) 

 

호는 자산(自山)이며, 필명으로 운문생(雲門生)·팔대수(八大搜) 등을 사용했고,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우리의 문명과 문학, 그리고 음악 등의 정신적 근원을 상고사상에서 발견코자 했던 근대 국학의 중심인물이다.
1900년대 후반에 서북지방 교육활동에 참여하고 1910년 국권피탈 이후에는 마산 창신(昌信)학교에서 교사로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던 끝에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日本]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1916년경 다시 마산으로 돌아와 대종교 비밀결사적 성격이 강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마산지부장을 맡고, 3 ·1운동 때는 마산시위를 주동하였다. 이후에는 서울로 올라와 1921년 조선청년회 기관지《아성(我聲)》의 편집인, 이듬해에는 신천지사(新天地社)의 편집인이 되었다. 1928년부터는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에서 촉탁으로 일하면서 음악 및 국문학 관계의 방대한 왕실 소장 자료들에 접하여 훈민정음의 악리(樂理) 기원설 제시, 가시(歌詩) 장르 설정(삼대목체·정읍체·첩성체·경기체·장편·시조) 등의 업적을 남겼다.
안확은 당시 지식인들의 일반적 경향이었던 사회진화론과 문명개화론을 적극 주장하였지만, 서구문명 우월주의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우리 민족의 좋은 점을 찾아, 민족 스스로의 역량에 의한 개화와 선진문명의 성취를 도모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또한 안확의 사관은 당대의 대종교계통의 국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정신사관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그의 『조선문학사』를 문학을 통한 우리 민족의 국민사상사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안확은 먼저 단군시대 덕화(德化)의 종교 기풍으로 인해 두려움의 기도와 기쁨의 노래로 모든 일에 응했으며, 남녀가 서로 서로 사랑하고 임금과 신하가 서로 화목했다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도 모음(母音)의 발달이 세계 언어 중 가장 많고 우수한 경어(敬語)가 풍부하며 민족성이 온아하고 순후한 것은 이러한 상대 문학의 사상에서 유래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는 상고문학의 기원을 대종교의 ‘종사상(倧思想)’에서 기원한다고 보고, 상고 문학의 기원을 종교적 신화에서 발견코자 했으며 그 종교적 신화의 한국적 원형을 ‘종화(倧話)’에서 찾고자 했다.
안확은 이 ‘종화’의 주요 모티브를 삼신(三神)에서 찾았고 삼신의 속성인 덕(德)·혜(慧)·력(力)의 섭리가 인간의 생활로 작용되는 것으로 보았다. 까닭에 안확은 이러한 ‘종’의 관념이 일반 국민의 중심사상을 구성하여 생활 깊이 파고드니, 그 주관적 의식의 발달이 개인 윤리의 역사를 나타내고 그 객관적 도덕질서의 발달이 사회 윤리의 역사로까지 발전하여 고대 한국의 인문사(人文史)를 형성했다고까지 말했던 인물이다.
안확의 이러한 논리는 대종교 삼일철학의 원리가 담긴《삼일신고(三一神誥)》에 잘 나타나는데, 안확 또한 이《삼일신고》를 ‘종화’의 모전(母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안확은《삼일신고》를 인도의《베다(Veda)》, 페르시아의《벤디다드(Vendidad)》, 그리고 히브리의《구약(舊約)》과 같은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한마디로 안확은 대종교의 ‘종’사상을 통해 국학의 정신을 세우려 했던 인물이다. 그는 위에서 언급한 「삼일신고」뿐만이 아니라, 대종교에 전래되는 상고 신가(神歌)를 후대 시가의 맹아로 간주하는 등, 국문학사의 뼈대를 ‘종’사상에서 찾았다. 더욱이 대종교의 영향은 안확의 문학사관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는 고유사상과 외래사상과의 관계를 대립이 아닌 ‘협화(協和)’의 개념으로 파악함으로써 사회진화론과 일정한 차이를 드러내는데, 이 ‘협화’의 개념 역시 대종교의 영향에서 기인한 것으로, 풍류도의 ‘접화군생’과 일맥하는 가치다.
안확은 1930년대 초에 일본의 식민통치가 본격화되자 국학 연구의 한계를 느끼고 방랑생활로 들어가 북간도·연해주, 중국 대륙, 미국(하와이) 등지로 전전하면서 민족사의 유적지를 찾고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다가 7년 만에 서울로 돌아와 정인보(鄭寅普) 등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교분을 나누면서 고구려 문학·시조·향가·미술사 등에 관한 연구활동을 재개하였다. 1945년 8 ·15광복을 맞아 정당활동에 뜻을 가졌으나 1946년 11월에 급환으로 죽었다.
안확의 글로는《조선문법(朝鮮文法)》(1917)·《조선무사영웅전(朝鮮武士英雄傳)》(1919)·《자각론(自覺論)》(1920)·《조선문학사(朝鮮文學史)》(1922)·《조선문명사(朝鮮文明史)》(1923)· 《시조시학(時調詩學)》(1940) 등의 저서와 <조선어의 가치>(1915) 외 140여 편의 논문 ·논설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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