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성지(남)
백두산
작성자 : 관리자
등록일 : 2008-09-09성지 백두산
1. 명칭고찰
다음으로 '불함(不咸)'과 '개마(蓋馬)'의 명칭을 주목해 보자. '불함'은 그 음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밝달'의 '밝'이나 또는 '밝음' '붉음'과 통할 수 있다. 이미 최남선의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이나 안재홍의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에서 광명인 '밝'과 '불함'을 같은 의미로 간파하면서 '불함산'이 곧 '백산(白山)' '백악(白岳)'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고어(古語)에 있어서 '화(火)'의 의미인 '불'과 '광명'의 의미인 '밝음'의 의미는 서로 통하는 바가 있으며 '블-ㅂㆍㄹ-발-밝'이 전변(轉變)하여 온 사실을 볼 수 있는 만큼 '불함'의 산명(山名)과 '백(白)'의 산명은 동의이서(同意異書)라고 말한다. 끝으로 '도태(徒太)'의 의미 역시 '한밝[太白]'의 뜻을 갖는다. <위서(魏書)>에서는 '도태'의 의미를 위(魏)나라 말로 태백(太白)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고 <신당서(新唐書)> <말갈전(靺鞨傳)>에 적힌 '태백산(太白山)'을 '도태산(徒太山)'이라고도 한다는 내용으로 보아 '도태'라는 말이 다름아닌 우리말 ' 한밝달(뫼)'을 한자로 옮겨 쓴 지방어(地方語)임을 확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백두산의 이명(異名)인 '불함(不咸)', '개마(蓋馬)', '도태(徒太)' 등은 모두 '밝달' '한밝달'의 의미가 한자로 이기(異記)된 것 뿐이며 백두산이 명칭 역시 '밝달'-'백산(白山)'의 과정을 지나 정착된, 고귀한 정신적 의미를 담은 것이라 하겠다.
한편 금나라를 계승한 청나라 때도, 성조(聖祖) 강희(康熙) 16년(1677) 왕족의 내대신(內大臣) 각라오본눌(覺羅吳本訥) 등을 보내 조종발상지지(祖宗發祥之地)로 전하여 오는 이 산을 간심(看審)하게 하였는데, 오본눌(吳本訥) 등은 그 해 5월에 황제(皇帝)의 윤음(綸音)을 가지고 백두산 천지(天池)까지 올라와 봉심(奉審) 예배(禮拜)하고 돌아갔으며,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산을 '장백산지신(長白山之神)'으로 존봉하고 세시(歲時)로 망제(望祭)하게 하며, 강희제(康熙帝)가 친히 송시(頌詩)를 지어 바쳤다고 전한다.(<청사(淸史)><성조본기(聖祖本記)>권3, <만주원류고(滿洲原流考)> 권1, 권14)
특히 <와유록(臥遊錄)>을 보면 백두산 고개밑에는 한줌 흙과 한치 풀도 없고 가다가 소나무·삼나무가 있으되 굳센 바람에 아슬아슬한 바 되어서 모두 낮고 꼬부라졌으며 아랫고개의 북쪽으로 한 시내를 건너 평한 땅 두어수리를 얻으니 나무가 있으되 또한 울퉁불퉁하여 높이가 두어자에 지나지 않는지라. 풍속에 박달(배달나무)이라 부르니 세상에서 단군(檀君)께서 처음 내리신 땅이라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백두산은 신인(神人)께서 처음으로 하강하신 영산(靈山)이요, 또한 신시(神市)를 베풀어 홍제(弘濟)의 대도(大道)를 일깨워 배달나라[檀國]를 건설한 성지(聖地)다. 그러므로 <삼일신고해설(三一神誥解說)>에서는 우리 민족 배달문화의 발상지인 백두산을 '지상천궁(地上天宮)'으로 숭앙하고 있다.
이 지역과 관련하여 인접 국가와 국경분쟁이 가시화되기시작한 것은 대륙방면에서 명조(明朝)를 대신하여 청조(淸朝)가 세력을 장악하면서 부터이다. 그 배경은 백두산을 '발상지지'로 인식해 온 청(淸)나라가 조선(朝鮮)과 국경선상에 위치하게 되므로 본격화된다. 청나라는 제4대 성조(聖祖)의 강희(康熙) 16년(서기 1677년)에 백두산 참례(參禮)와 그 이듬해 망제(望祭)의 예(禮)를 시작으로, 강희 24년(서기 1685년)에는 주방협령(駐防協嶺) 늑초(勒楚)를 보내어 재차 백두산 답사를 행하고, 또 측도(測圖)에 능한 야소회사(耶蘇會士)등을 재삼 파견하여 백두산정계비(定界碑)의 건립을 보기에 앞서 서기 1710년에는 '장백산도(長白山圖)'의 완성을 보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 조선과 청나라 양국 민간인 사이 크고 작은 분쟁이 일어나 많은 살상자까지 발생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마침내 서기 1712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 함경감사(咸鏡監査) 이선부(李善溥)와 청나라의 예부(禮部)에서 파견된 목극등(穆克登) 일행 사이에 협의를 거쳐 백두산 천지하(天池下) 분수령상(分水嶺上)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게 된다. 이 정계비가 바로 한(韓)·만(滿) 국경을 확정하는 최초의 기념물이다. 그 후 서기 1882년 한·청 두 나라사이에 국경분쟁이 새롭게 대두되면서 새로이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에 대한 내용 검토및 사실 규명이 있었다. 즉 전부터 두만강 건너편 간도지역(間島地域)에 들어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던 우리 농민들과, 새로 만주개발계획에 의하여 이 방면으로 들어온 청국인(淸國人)들과의 분쟁 알력이 생기고, 청나라 지방관리들은 '토문강(土門江)'서북지역을 점령 개간하는 우리 주민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러한 청나라 관리들의 태도와 입주청인(入住淸人)들의 행동이 점차 심각해지자 우리 주민들은 문제의 해결을 지방관부(地方官府)에 공식으로 호소하게 된 것이다. 호소의 중심은, 분수령정계처(分水嶺定界處)에서 발원(發源)하는 것은 토문강이요, 두만강이 아니므로, 우리 땅인 이서(以西) 이북(以北) 지역에서 농사짓는 우리 주민에 대해 청(淸)측이 왈가 욀부하는 것은, 경계선이 되는 토문강을 우리의 국내(國內) 강류(江流)인 두만강으로 잘못 인식한데서 온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서기 1886년 우리측 대표인 이중하(李重夏)와 청측 대표인 덕옥(德玉)등이 회령부(會寧府)에 만나, 우리 측의 주장이 합당하다는 결론하에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松花江)의 지류(支流)임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청나라는 이 일이 있은 후에도 간도지역에 대한 권리를 수시로 주장하였으나 우리는 그들 주장의 부당함을 내세워 간도지역에 대한 영토관리와 주민보호에 노력하였다. 급기야는 일제침략기에 간도지역이 남만철도(南滿鐵道) 부설권(敷設權)과 흥정거리가 되기도 하였지만,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에서 파생되는 이 간도(間島)의 영토 문제는 아직도 한(韓)·중(中) 양국간의 공식타결을 보지 못한 채 남아 있는 것이다. |
- 이전글 ▲
-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
- 다음글 ▼
- 평양 숭령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