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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인물

송촌 지석영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08-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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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촌 지석영(池錫永, 1855~1935)
 

의사·문신·국어학자·대종교인.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공윤(公胤),호는 송촌(松村). 서울 낙원동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의학교육을 받은 일은 없으나 이찍부터 서학(西學)을 동경하여 중국에서 번역된 서양의학책을 탐독하였는데,특히 관심을 둔 것은 영국인 제너(E. Jenner)의 종두법(種痘法)에 관한 것이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일본과 체결되면서 수신사로 지석영의 스승인 박영선(朴永善)이 가게 되었다. 오다키에게 박영선은 우두법을 배우고 구가(久我克明)의《종두귀감種痘龜鑑》을 얻어다 주었다. 그 뒤 일본해군이 세운 부산의 제생의원(濟生醫院)에 가서 원장 마쓰마에(松前讓)와 군의 도즈카(戶塚積齊)로부터 2개월간 종두법을 배우고 두묘(痘苗)와 종두침 두 개를 얻어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처가가 있는 충주에 들러 40여명에게 우두를 놓아주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사람에 의한 공개적인 종두법 실시의 시초이다. 두묘의 공급이 잘 안되어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원으로 일본 도쿄에 건너가서 그곳 위생국 우두종계소장(牛痘種繼所長) 기쿠치에게 종두기술을 익히고 두묘의 제조,저장법과 독우(犢牛)의 사양법(飼養法)․채장법(採漿法)을 배운 뒤 두묘50병을 얻어가지고 귀국하였다. 서울에서 두묘를 만들어 종두를 보급하면서 군의 마에다(前田淸則)로부터 서양의학을 배웠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일본에서 종두법을 배워왔다는 죄목으로 체포령이 내려 피신하였으나 종두장은 난민들의 방화로 불타버렸다. 정국이 바뀌어 종두장을 재건하고 전라도어사 박영교(朴永敎)의 초청을 받아 전주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종두법을 가르치며, 종두를 실시하였다. 이듬해에 충청도어사 이용호(李容鎬)의 요청에 의하여 공주에 우두국을 설치하면서《한성순보(漢城旬報)》에 외국의 종두에 관한 기사가 실려 종두법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종두법의 보급에 진력하면서 1883년 문과에 등제(登第)하여 성균관전적과 사헌부지평을 역임하였다. 1885년《우두신설(牛痘新說)》을 지었는데 여기에는 제너의 우두법 발견을 비롯하여 우두의 실시, 천연두의 치료, 두묘의 제조, 독우의 사양법, 채장법이 간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1887년 전남 강진의 신지도(薪智島)에 유배 가서도 우두를 실시하였다. 1892년 유배가 풀려 서울로 돌아온 이듬해 우두보영당(牛痘保嬰堂)을 설립하고 많은 어린이들에게 시술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위생국에서 종두를 관장하게 되고 김홍집내각이 들어서면서 형조참의․승지를 거쳐 동래부사를 지냈는데 임지에서도 우두를 실시하였다. 학부대신에 의학교 설립을 제의하여 1899년 의학교가 설치되자 초대교장으로 임명되면서 일본인 교사들을 초빙하여 일본의학책을 번역하고 가르쳤다. 1902년 훈동(勳洞)에 의학교의 부속병원이 설립되었고, 이듬해 첫 졸업생 19명을 내놓았다.
그는《황성신보(皇城新報)》에〈양매창론楊梅瘡論〉을 발표하여 매독의 해독을 대중에게 알렸고,온역(瘟疫)․전염병·양매창의 예방법을 만들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907년 의학교가 폐지되고 대한의원의육부(大韓醫院醫育部)로 개편됨과 함께 학감에 취임하여 1910년 사직할 때까지 11년간 의학교육에 헌신하였다. 그는 근대의학의 도입 뿐만 아니라 1882년 올린 상소에서는 급속한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이를 위해 일종의 훈련원을 세우자고 주장하였다. 그곳에 당시의 세계정세를 알 수 있는 책과 외국의 과학기술에 관한 책들을 모으고, 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물을 수집하여 전국에서 뽑아온 젊은이들에게 보이고 가르치자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1890년대 후반에는 독립협회 주요회원으로 활동하며 많은 토론회에 참가하여 의견을 발표하였다. 다른 회원들이 대부분 서양문물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이자는 태도로 쏠려 있던 때 좀 다른 생각을 가졌던듯하다. 예컨대 음력을 주로 쓰되 그 옆에 양력을 아울러 표사하자는 의견과 개화가 늦어지는 이유도 어려운 한문을 쓰기 때문이라 보고 1905년 알기쉬운 한글을 쓰자는 의견을 주장하였다. 더욱이 그는 주시경(周時經)과 같이 한글의 가로쓰기를 주장한 선구자였다. 1908년 국문연구소 위원에 임명되었고,이듬해 한글로 한자를 해석한《자전석요(字典釋要)》를 지어냈다. 그의 주장은 인정을 많이 받아냈고, 고종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태극장(太極章)·팔괘장(八卦章) 등을 내렸다. 그러나 얼마 후 한일합병이 되자 모든 공직을 버리고 일본의 간곡한 협조요청에도 불구하고 초야에 묻혀 살다가 80세로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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