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대종교인물

"대종교, 하늘 땅 사람"이 하나 되는 생명의 종교

종교인물

호석 강우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08-09-18

첨부파일

강우.jpg


호석 강우

 

강우는 1862627()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순서(舜瑞), 호는 호석(湖石), 아명은 득순(得舜), 본명은 석기(錫箕)이다. 대종교에 입교한 후 강우(姜虞)로 이름을 바꾸었다.

7세 때인 1867년부터 15년간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다. 9세에 한시를 지었으며, 도장원(都壯元)에 급제하였다. 14세에 사서삼경을 재독하고 가관례(加冠禮)를 지낼 정도로 근방에 신동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28세 때인 1900년 함경북도 경흥의 감리(監理)가 되었고, 1901년 성진과 길주의 감리를 지냈다. 이때 서일(徐一현천묵 등 함경도 출신의 대종교인들과 교류하였다. 19046품 승훈대부로 승진하여 남포(藍浦·보령) 군수, 1906년 홍주(洪州·홍성) 군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는 그가 관료의 신분으로는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을 보인다.

그 무렵 그는 나라를 구할 방책으로 1) 학교 설립 2) 식산은행 설치 3) 미류(美柳) 심기 4) 양잠업 5) 황무지 개척사업 등 5가지를 제시하였다. 우선 그는 고향 임천에 사립 천영(天英) 학교를 설립하고 인근 마을에 80여 개소의 노동야학을 운영하였다. 이어 공주와 강경 등지에 농공(農工)은행을 설치하여 잔상소농(殘商小農·중소 상농인)들에게 자금을 융통해주었다. 또 호서지방에서는 처음으로 금강 연안에 미루나무 수십만 그루를 심었으며, 양잠·양봉·양어학 등 실업(實業) 서적도 펴냈다. 그는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실천적 인물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군대해산과 정미7조약 등을 겪으면서 그는 국망(國亡)을 예견하고 국혼을 되살리기 위해 대종교에 귀의하였다. 1909115() 나철이 대종교를 중광하자 당시 48세의 나이로 입교하였다. 1911115일 지교(知敎), 1914513일에는 상교(尙敎)로 승질(陞秩·교질이 높아짐)되어 총본사의 총전리(總典理)로서 5년 동안 최고 행정책임자로 근무했다.

1911년 교주 나철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망명하자 1913년 봄 그도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해 7월 공업전습소 때부터 인연이 있던 박찬익과 박승익을 간도 용정에서 만나 대종교를 권하였으며, 8월에는 나철·백순과 동행하여 청파호 단산(檀山) 상봉에 올라 백두산을 처음으로 본 후 그 소감을 남겼다. 1914년 대종교 체제를 사도 교구와 외도 교계로 개편할 때 그는 남도 본사를 담당하였다. 그는 상해 서도 본사를 맡은 신규식과 러시아 소학령의 북도 본사를 맡은 이상설 두 사람의 대종교 입교에 큰 역할을 하였다.

19161215잏 정교(正敎)로 승질됨과 동시에 대형(大兄) 호를 받았다. 191812일에는 교주를 제외하고는 최고위 직책인 사교(司敎)에 임명되었다. 1921년에 남도 본사를 부설(復設·다시 세움)하고 도사교위리(都司敎委理)로서 3년간 근무하였다. 1914613일 교주 나철(羅喆)을 대신하여 백두산 상봉에 올라 혈서로 천제를 지냈으며, 1920년에는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서, 1924년에는 마니산 참성단(塹城壇)에서 수도하였다.

이밖에도 그는 대종교 교리연구에도 진력하여 <종리문답(倧理問答)>, <천산도설(天山圖說)>, <제천혈고사(祭天血告辭)>, <일삼경(一三經)>과 유시 애오가(愛吾歌)’를 남겼다. 특히 1925년에 펴낸 <종리문답>을 통해 교인들이 대종교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5055일 규범개정으로 도형(道兄)의 호가 추증되었다.

청호 총본사에서 근무하던 중 1919년 가을 모종의 사건으로 간도 주재 일본영사관에 검거돼 국내로 추방 명령을 받고 귀국하였다. 192210월 개천절 행사 참석차 고향 부여에서 상경하여 가회동 3남 용구(鎔求)의 집에 머물던 중 11193남 용구, 손자 을모(乙模·당시 중앙고보 1학년) 3인이 동대문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는 그의 차남 철구(鐵求)가 임시정부의 독립공채를 모집하다 간도에서 잡혀 동대문서로 압송되면서 빚어진 일인데 조사 결과 그는 무혐의로 풀려났다.

슬하에 진구·철구·용구 3남을 두었는데 모두 정교(正敎)와 대형(大兄) 호를 받았다. 장남 진구(鎭求)는 한성무관학교 출신으로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과 육영사업에 힘썼으며, 참교, 지교를 거쳐 정교로 승질하였다. 차남 철구는 임오십현의 한 사람이다. 3남 용구는 간도 명동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북로군정서 경신국장(警信局長)으로 활약했다. 용구는 상교, 정교를 거쳐 대종교 원로원 참의를 지냈다. 한 집안에 2대에 걸쳐 4명의 원로가 나온 것은 대종교에서는 유일하다.

그는 일제의 탄압과 교단 내의 분열과 갈등 속에서도 중심을 잡고 남도본사를 지켜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말년에 숙환(중풍)으로 고생하던 그는 1931330일 충남 부여 자택에서 70세로 별세했다. 장례는 44일 동지연합장()으로 치러졌다. 유해는 부여면 봉동산 서쪽 기슭에 안장되었다.

현재 미서훈 상태다.

 



<유서>
특별히 우리 배달 동포에게 고함/ 호석 강우

 

아아, 우리 산남 산북의 여러 종족들이여,

우리 반만년 종사를 잊지 마시오.

 

종사의 없어지지 않음은 오직 우리 대교에 있소.

대교, 대교, 우리 한배님...

 

이전글
[순교자]백람 이재유
다음글
단암 이용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