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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숭령전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22-04-22

[대종교 서1도구 관할]

 

숭령전(崇靈殿)은 ‘단군’과 고구려 시조 ‘동명왕’을 모시는 사당으로, 현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 평양학생소년궁전 옆(옥류관 인근)에 위치해 있다. 고려시대에 동명성제사(東明聖帝祠), 조선조에서 단군묘(檀君廟)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영조 원년(1725)에 숭령전이라 고쳐 불러 오늘에 이른다. 고려 시대에는 때때로 왕의 특사가 파견되어 제사를 지냈으며,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현지 관원이 제사를 지냈는데 백성들이 특별한 일이 생겼을 때 가서 소원을 빌기도 했다.

 

조선조 세종 11년에 처음으로 정전 4칸과 동서행랑 각 2칸을 지어 봄가을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 지냈으며, 세조 원년 7월에 위판을 바꾸어 ‘조선시조단군지위(朝鮮始祖檀君之位)’라 했고, 세조 5년 10월에 세자를 데리고 가서 친히 제사 지냈다. 숙종 5년에도 신하를 보내 제사 지내고, 23년에〈단군묘시(檀君廟詩)〉를 지어 바쳤다. 영조 원년에 임금이 평안감사 이정제(李廷濟)의 말을 통해 숭령전 현판을 썼고, 5년에 참봉 2인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으며, 25년에 승지를 보내 제사지냈다.

 

정조 5년 예관을 보내 제사드릴 때 이병모(李秉模)에게 명하여 제문을 지어 바쳤다. 순조 4년 평양성 안의 큰 화재로 숭령전도 소실되었으나 곧 복구되었다. 고종 5년 경복궁의 중건공사가 준공되자 교서(敎書)를 내리고 평안도관찰사를 숭령전에 보내 제사 지냈으며, 세제(歲祭) 때“참으로 하늘이 덕을 내리사 동녘 땅에 큰 기틀을 처음 세우셨도다. 이에 제사를 드리오니 큰 복을 내리소서.”라는 축문을 올렸다.

 

건축상 숭령전은 조선 중기 이후 건물의 특징을 잘 나타낸 건물로서 구조가 웅장할 뿐만 아니라 섬세하고 화려한 살미 조각으로 특색을 띤 귀중한 유산이다. 본전 한 채에 단군의 위패를 봉안하고 동명성왕을 동측에 배향시켰으며, 좌우 행랑과 궐문이 있고 그 앞에는 과자개하마라는 비문이 있었다. 본전은 정면 4간(12.88m), 측면 3간(9.17m) 안 단층의 겹처마합각식 건물이다. 높은 기단 위에 굵직한 흘림기둥을 돌려세우고 포식 두공을 얹었다. 안팎 3포로 짜 올린 두공에 첨차 하나를 더 물려 5포두공처럼 꾸며 건물이 웅장하고 위엄 있으면서도 화려해 보이도록 하였다.

 

우리나라의 옛 건물들이 일반적으로 정면 간수가 홀수인데 비해 이 건물은 짝수인 것이 특이하다. 그것은 서쪽 2간을 ‘단군제단’으로, 동쪽 2간을 ‘동명왕제단’으로 이용해야 하는 사정에 따라 그렇게 했던 것이다. 대문은 정면 3간, 측면 2간의 홑처마 배집(맞배집)이며, 문길은 가운데 1간에만 냈다. 옛날에는 중심 건물 외에 동쪽 행랑이 3간, 서쪽 행랑이 2간, 대문이 3간, 동쪽과 서쪽에 달린 좁은 문이 각각 한 간씩 있고 기타 건물들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간에 파괴되어 해방될 무렵에는 본전과 대문만이 남아 있었다.

 

이상의 기록에서 고려에 이어 조선조에 들어와서 특히 국가적 차원에서 단군을 국조로 봉안하였으며, 단군과 동명왕 중에서도 ‘단군’이 중심적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단군을 봉안한 사당으로서 숭령전은 구월산 삼성사와 더불어 근대까지 보존된 문화재였으나, 경술(1910)년부터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암 나철은 이듬해인 신해(1911)년 7월에 단군의 영적을 찾기 위하여 먼저 강화 마니산에 오른 뒤, 곧바로 평양 숭령전을 찾았다. 이곳에서 나아가 백두산 아래 만주 화룡현 청호(靑湖)에 새로 교당을 세워 대종교 부흥에 힘썼다. 이로부터 40년이 지난 뒤, 1951년 1월 9일 625 동란 시기에 이번에는 미제의 야수적 폭격에 의해 또다시 큰 피해를 입었다. 현재 건물은 북한 당정부의 문화 유물보존 시책에 의하여 1955년에 옛 모습대로 보수된 것이다. 성지 숭령전의 복원이야 말로 민족사적 의의를 정립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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