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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 권오설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08-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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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 권오설(權五卨, 1897~1930) 


어렸을 때의 호(아호)는 오서()이며, 권일()·권부덕()·권형신()이라고도 불리었다. 1899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으며 1946년 조선공산당의 기관지《해방일보》 사장을 지낸 권오직()의 형이다.

1916년 대구고등보통학교(경북고등학교의 전신) 재학 중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퇴학당하여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중앙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광주로 내려가 전남도청에서 근무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시위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복역하였다. 석방 후 귀향하여 안동군 일직면 일직서숙(
)에서 학생을 가르쳤으며, 1920년 안동청년회에 가입하였으며, 안동의 풍산소작인조합을 지도하였다.

1923년
사회주의 단체인 화요회() 및 북풍회()와 연관이 있는 화성회()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서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김단야(金)·신철수() 등과 함께 마산에서 조선공산당 마산지부 창당준비를 지도하였다.

1925년 고려공산청년회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2월에는
박헌영() 등 고려공산청년회 지도부 다수가 체포되자 제2대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6년 4월 박래원()·민창식() 등과 함께 6·10만세사건을 계획하였고, 6월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옥고를 치르다 1930년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하였다. 2005년 3·1절에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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