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의 호(아호)는 오서(五敍)이며, 권일(權一)·권부덕(權富德)·권형신(權亨信)이라고도 불리었다. 1899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으며 1946년 조선공산당의 기관지《해방일보》 사장을 지낸 권오직(權五稷)의 형이다.
1916년 대구고등보통학교(경북고등학교의 전신) 재학 중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퇴학당하여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중앙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광주로 내려가 전남도청에서 근무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광주에서 시위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복역하였다. 석방 후 귀향하여 안동군 일직면 일직서숙(一直書塾)에서 학생을 가르쳤으며, 1920년 안동청년회에 가입하였으며, 안동의 풍산소작인조합을 지도하였다.
1923년 사회주의 단체인 화요회(火曜會) 및 북풍회(北風會)와 연관이 있는 화성회(火星會)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창립대회에서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김단야(金丹冶)·신철수(申鐵洙) 등과 함께 마산에서 조선공산당 마산지부 창당준비를 지도하였다.
1925년 고려공산청년회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2월에는 박헌영(朴憲永) 등 고려공산청년회 지도부 다수가 체포되자 제2대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6년 4월 박래원(朴來源)·민창식(閔昌植) 등과 함께 6·10만세사건을 계획하였고, 6월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옥고를 치르다 1930년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하였다. 2005년 3·1절에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