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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인물

"대종교, 하늘 땅 사람"이 하나 되는 생명의 종교

항일인물

경산 이규채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1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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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공삼(公三) 호는 경산(庚山)·동아(東啞)·우정(宇精). 일명 규보(圭輔). 아버지는 철영(喆榮)이다.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防築里) 출신.

∘1908~1910년까지 청성학교(靑城學校)에서 교편을 잡고 후배교육에 힘썼다.

∘1910년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자 교육계에서 물러나 한학(漢學)과 서예에 정진하면서 때를 기다리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가담하였다. 3·1운동 이후 창신서화연구회(創新書畵硏究會)를 창설하여 회장으로 취임하여 남녀학생을 상대로 비밀리에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일본경찰에 발각되자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이후 상해혁명자동지회(上海革命者同志會)에 가입하여 항일무장투쟁의 선봉대로서 중국의 각지를 활동하여 일본의 군시설과 일본인 거류지를 습격, 방화하였다.

∘1924년 12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1930년 7월 26일 한족자치연합회를 모체로 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키 위한 목적으로 홍진(洪震)·신숙(申肅)·남대관(南大觀)·지청천(池靑天) 등이 중심이 된 한국독립당이 창설되자 정치부의원 겸 군사부 참모장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3월 조경한(趙擎韓), 이종선(李鍾善) 등과 함께 아성현(阿城縣) 영발둔(永發屯)에 있는 중국군 사령관 고봉림(考鳳林)과 참모장 조린(趙麟) 등을 탐방하여 한·중군의 공동항일전 합작을 협의하였다. 이어 한국독립당의 총무위원장이 되어, 1933년 본부를 만주(滿洲)에서 북경(北京)으로 옮기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후 남경에 본부를 두고 있던 신익희(申翼熙)·윤기섭(尹琦燮) 등의 한국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이 제휴하여 1933년 10월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으로 발전적 통일을 보게 되었다. 1934년 신한독립당의 감찰의원장으로 피선되어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1935년 9월 25일 상해에서 일본경찰에 붙잡혀 그해 경성지방법원에서 10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 1940년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도 항상 일본경찰의 감시 속에 나라의 광복을 염원하면서 생전에 효도를 다하지 못한 어머니의 묘 앞에서 여막을 짓고 3년간 정성을 다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정계 일선에서 국가재건을 위하여 애쓰는 한편, 단군전봉건회(檀君殿奉建會) 부위원장을 비롯하여 신탁통치반대 국민연맹위원직과 미소공동회의대책 국민연맹 대표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으로 큰 공을 세웠으며, 대종교 총본사 정의참의(政議參議)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문무(文武)를 겸비하였으며,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부모에 대한 효성이 매우 지극하였으며, 정교(政敎)가 한결같았다.

∘출생지인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에 행적비(行蹟碑, 향토유적 제10호)가 세워져 있다.

∘1963년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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