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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묘향산 단군굴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22-04-22

[대종교 서1도구 관할]

 

단군굴 / 현진건

본고는 빙허 현진건의《단군성적순례》가운데 묘향산 편에서 발췌하여 현대문으로 옮긴 것입니다. -옮긴이 주.

 

1. 국진굴과 천주석

(1932년 7월) 12일 이른 아침, 단군굴 근참의 길에 오르다. 중봉은 구름바다에 잠기고 계류조차 안개 자락에 흐리었음은 장마가 아직 쾌청을 않은 모양이다. 언제 호우가 천지를 뒤집을는지 모를 일이요, 앞길은 인적조차 끊어진 심산절벽이라, 우리의 준비도 대단하다. 폭우와 노영을 위한 캠프와 침구며, 솥, 냄비 2일 양과 의류 등 짐이 자못 부프다. 인생이란 언제든지 중하를 벗지 못하는가 하자 탄성이 절로 난다. 첫째 인도자가 문제다. 금일 행정은 단군굴, 만폭동, 금강굴인데 1년 치고도 순례자가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탓에 그 소삽한 길―의젓한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산용과 수태를 보아 그 방향을 더듬어 길을 만들어 가는 길―을 혼자 아노라고 장담하고 나서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1년 전에 혹은 수년전에 한 번 다녀온 이로, 모르는 길과 아는 길을 서로 덜고 더하기로 하고 인도자 두 분을 얻었다. 짐꾼이 셋이요, 나와 차군을 합하면 일행 7인이다. 성지와 영역에 제일보를 내어 디디는 위구와 경건에 옷깃도 저절로 여며진다.

 

보현사를 뒤 둔지 23마장이 되었을까 말까, 길옆에 커다란 바위가 45인이 용신할 만한 입을 벌린 것을 국진굴이라 한다.《영변읍지》에 의하면 아득한 옛날, 행인이 태백산 아래에 나라를 세우니 신라 시조 혁거세와 병립이라. 고구려 동명왕 6년 기축에 고구려 장수 오이부분노가 침공하자 행인왕이 대패하여 이 석굴 속에 은신하였다가, 필경 생포되었다는 곳이다.

 

‘여기도 흥망의 자취가 있구나’하자 비 젖은 석면에 누흔이 새로운 듯 하였다.

 

개울을 한 번 넘어 빈발암에 오르니 천주석이 전용을 나타낸다. 탁기봉 중복에 그 이름과 같이 하늘을 고인 듯이 직립한 거암이 돌올하게 200여 척을 솟았다. 인도승 하나가 설명하기를“저 천주석은 단군굴에 올라서면 바로 정면으로 보이는데 그 때 단군님께옵서 굴에서 활을 쏘시면 그 화살은 10리허에 날라 저 바위를 맞추고, 여력으로 그 화살은 뒷걸음질을 치며 다시 단군님께로 날아왔답니다. 그러기에 단군님께서는 화살 하나로 무예를 강습하셨지요” 하고 자기가 눈으로 본 듯이 역력히 지점하며 자못 흥분한 태도다. 나는 그의 엄숙한 얼굴찌에 이지를 초월한 불멸의 신앙광을 본 듯 싶었다.

 

2. 가짜 단군굴

 

빈봉에서부터 길다운 것은 끊어지고 밭 바닥으로 들어서서 무성한 콩과 조 이삭을 헤치며 한참 가노라면 다시 개울가로 내닫는다. 너덜너덜한 돌과 모래와 군데군데 고인 물을 뛰고 건너고 발을 적시고 잠기고 하다가, 윗머리가 엇비슷하게 내밀은 바위를 만나니 그 석면에〈단군굴입구〉라고 묵흔이 뚜렷한 다섯 글자가 우리를 맞아준다. 얼마나 반가운지. 이것은 재작년 신안주지국장 김병양 씨 일행이 순례하는 길에 뒤에 오는 이를 위하여 표지로 남긴 것임을 미리 들어 알았다. 소삽한 이 길 녘에 얼마나 뜻 있고 도움이 되는가.

 

잡목 숲에 가린 급경사의 앞길을 바라보며 우리는 바위 위에서 소게하였는데 그 때 인도승 하나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빈봉의 동편으로 얼마쯤 꺾어 들어가면 직립한 큰 바위가 있고 그리 크지 않은 석굴이 있어, 속칭 가짜단군굴이라 하는데 그 유래는 이러하다. 옛날 평안감사나 영변부사가 도임을 하면, 의례 체면치례로 단군굴을 근참하는 법인데 발과 손으로 기어올라도 위험한 길을 남여를 탑시고 행차하는 바람에 죽어나는 이는 승려들이었다. 고지식하게 피땀을 흘리다가 못하여 가깝고 편한 거기를 단군굴이라고 속여 배례를 시킨 까닭에‘가(假)’자가 붙은 것이라 한다. 지금도 당시 감사 모모들의 새긴 글자가 뚜렷이 남아 있다던가. 학정 앞에는 허위와 휼사가 도리어 공도요 정의다. 근참의 기념 각자가 그 글자의 사라지기까지 후인의 조소와 후매를 입을 줄이야 그인들 뜻하였으랴.

 

실지로 답사를 해 보고도 싶었으나 여기에서 가자면 또 딴 일이요. 더구나 성스러운 이 길에 그런 것을 보는 것이 도리어 불결하다는 생각이 나서 앞길을 재촉하였다.

 

1) 열철에 냉수

 

산록으로 들어서니 인제부터 오르막이다. 한 걸음마다 급해지고 한 자국마다 촉해지는데, 길이란 형용도 없다. 초로도 길이요 석경도 길이련만 이야말로 그대로 산을 타는 것이다. 인적이 닿지 않는 곳은 아니겠으되, 인적을 찾을 수는 없는 곳이다. 교목과 거목은 볼 수 없고, 45년 혹은 67년생의 참나무, 전나무, 낙엽송들이 땅이 비옥한대로, 쭉쭉 곧게 올라가서 하늘의 해를 덮었는데 여러 해를 두고 떨어지고 썩고 한, 입사귀가 어제 오늘의 장마에 젖을 대로 젖어서 미끄럽기가 완연히 빙판이다. 흙이란 별로 구경을 할 수가 없고 나뭇잎 바다를 허우적거리고 발을 옮기는데, 한 자국을 올려놓으면 두 자국씩 미끄러질 지경이다.

 

그나 그 뿐인가 풀이 길을 넘는가. 한창 자란 억새풀 사리 떼가 얼굴을 할퀴고 잔등을 벗기고, 팔을 물고 늘어진다. 풀은 헤칠 수나 있지마는 더욱 질색할 것은 칡덩굴, 머루 덩굴, 다래 덩굴이 허리를 휘감고 발목을 잡아 다니는 것이다. 이 나무, 이 풀, 이 덩굴이 모조리 비를 흠씬 먹은 탓으로 건드리기만 하면 빗발이 우수수 떨어진다. 옷은 물에나 빠진 듯.

 

이따금 계곡이 열리며 반공에 걸린 폭포가 군데군데 승경을 이루었으되 발을 올려 디디기에 온 정신과 온 신경을 집중한 탓으로 어느 곁에 한 눈을 팔 여가조차 없다. 중턱에나 왔을까 말았을 때 문득 우렁찬 뇌성이 천지를 뒤흔들며 번쩍이는 자전이 안개에 흐린 봉만에 연련한 섬광을 던진다. 앞이 캄캄해지자 비는 은죽을 곤두세운 듯이 내리지른다. 우리는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산 위에서 비 맞는 맛이란! 겪어보지 않은 이는 이 상연한 맛, 통쾌한 맛을 상상하기 어려우리라. 턱에 닿던 마른 숨길도 축축이 젖고, 땀에 목욕한 불덩이 같은 몸도 시원하게 식는다. 내 몸 김이 무럭무럭 난다. 열철에 냉수를 끼얹은 듯. 살과 뼈가 통으로 안개가 되어 피어오르는 듯하다. 제발 안개나 되어다오! 임 나신 자리로 날아나 오르리라.

 

2) 을묘년 대홍수 이야기

 

중턱을 넘어갈수록 울창한 삼림은 더욱 깊고 초림은 더욱 우거진다. 지금까지 우리는 개미 체 바퀴 돌 듯 산허리에 매어달려 죽을 판 살판 기어 오른 것인데, 인제부터 중복을 지나 정상에 가까워가는 양하여 천야만야한 현애가 눈 아래 아슬아슬하게 깔린다. 취우는 벌써 걷히고 하계의 무해도 그 짙은 회색이 스르르 풀어지며 백색으로 옮겨가는 듯 하더니 어느 곁에 오리오리 경라로 나부끼며 슬금슬금 우리 발부리로 날아오른다.

 

우리는 운하를 밟는다. 능운보의 신선의 영능도 이 신역에 들어서면 그리 어려운 노릇이 아닌 모양이다.

 

군데군데, 타원형의 동글갸름한 취엽과 청수한 줄기와 가지를 가진 박달나무를 발견하고 임의 조그마한 그림자를 뵈옵는 듯, 경건한 가운데도, 그 줄기를 쓰다듬으며 그 잎사귀를 어루만지며 어머니의 젖꼭지에 매어달린 어린애 모양으로 나는 기뻐하였다. 여기 저기 고목 등걸이 쓰러지고 동량의 재목으로 훌륭할만한 거수가 턱턱 넘어졌는데 가장 늙은 인도승 하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이것이 모두 단목이요, 옛날에는 이 창울한 단목이 하늘을 덮었다 하오. 단목뿐이겠소. 이 거궁한 산에 백년, 천년 묵은 고목이 들어 쌓이지를 않았겠소. 그런데 을묘년 탕수에 이 결단이 났구려. 을묘년[1915]이면 18년전 되겠소. 을묘년 탕수야말로 신이 진노합신 탓이지요. 갑오년[1894] 난리에 이 근읍 백성들이 전부 이 산으로 피난을 했소. 호수로 천호, 인수로는 만 명이 넘었겠소. 이 군정들이 산림에 불을 함부로 처지르고 논을 푼다 밭을 간다, 마구 벗겨 먹었구려. 단군봉이 여기인데, 닭을 삶는다, 개를 퇴한다, 가진 부정한 짓을 다 했구려. 그래 천벌이 없겠소. 옛날에는 이 태백산에 오르자면 미리 기구를 준비했다가 대소변을 받아가지고, 멀리 내려가서 내버린 것이요, 그런 성지를 몰라보다니 글쎄 될 말이요. 갑오년에서 을묘년까지 한 20년 잘해 먹은 것도 하느님의 원덕이요 부처님의 자비지요. 산을 발가숭이를 만들어 놓았으니 어찌 사태가 나지 않소. 집채만큼씩한 바위가 그대로 굴러 떨어지고, 폭포로 내리지르는 물이 골마다 바다를 이루어, 순식간에 절이고 집이고, 다 떠나려가고 말았소. 사람도 수백 명 죽었지요. 에-참 천벌이란 무섭습니다.”

 

우리도 이 이야기를 듣고 송연하였다. 그 때 이 산을 주관하는 보현사와 백성들 사이에 20년 동안이나 분쟁이 그치지 않아, 여러 번 소요와 참극을 연출하였다 한다.

 

3. 어허! 단군굴

 

몇 모퉁이를 돌아 오르니, 문뜩 외연한 거암-거암이라기보다는 영이한 일좌의 돌산이 우리 앞을 막아선다.

인도승 하나가 가쁜 숨길을 내쉬며, “인제 다 왔소.”하는 바람에, 우리는 환성을 올리려다가, 인도승 또 하나가, “인제 정말 난관이요.”하는 말을 듣고, 멈칫하는 사이에 그는 정말 장여의 위초한 바위에 원숭이 모양으로 기어오르며, “그 전엔 여기 더위잡을 나무도 있고, 사다리 비슷한 것도 있었는데……”하고, 혼자 말로 중얼거린다.

 

나도, 활하기 빙판 같은 그 거대한 돌 몸에 파충류처럼 배를 깔고 달라붙었다. 이야말로 유진무퇴! 상승이 아니면 추락이 있을 뿐인데 발밑은 천인단애다. 생과 사의 관념이 번갈아 명멸하는 찰나, 무서운 원력이 회오리바람과 같이 전신을 뒤흔들며 수십 보를 줄달음으로 기다가 일어서니, 몸은 표표연 반공에 뜬 듯한데, 발은 광활신이한 일대 석굴의 최종단의 일부에 아실아실하게 놓여졌다.

 

이 석굴은 ‘굴’이라기보다 창궁의 ‘궁’자나 우주의 ‘우’자나 띄어, ‘석궁’ 또는 ‘석우’라고 부름이 실감을 방불케 할 만큼 거궁하다.

 

높이는 네 길이 넘을 듯, 전면의 넓이는 50척, 깊이는 35척 가량이니 굉걸한 전각 한 둘을 넉넉히 들여앉힐 만 하다. 석질은 아름다운 화강석으로 녹색 백색 무늬가 각양각색의 선을 둘렀다. 우리는 씨근벌떡거리는 숨을 죽이고 옷깃을 여미며, 엄연숙연히 한 걸음 두 걸음 안으로 들어서매, 습습한 청풍이 옷소매를 날리며, 이 세상 것 아닌 이상야릇한 습기가 끓는 가슴을 헤치고 선선하게 엄습한다.

 

물이끼가 파랗게 덮인, 동편 석벼레로부터 일조의 옥류가, 광선과 같이 번쩍이며 흘러 나린다. 타는 듯한 갈증에 나는 우선 그 수정 같은 물 한 바가지를 떴다. 한 모금! 두 모금! 빙수도 이 보담 더 찰까. 감로도 이 보담 더 달까. 냉기와 이향이 심신에 스미는 듯하며 열화와 같은 육신이 냉회처럼 식어 버리자 이는 시리고 몸은 떨린다. 손 끝 발끝이 저리다. 나는 분명히 홍로의 진세를 떠나, 임 계신 광한궁에 귀명한 모양이다. 일행은 어느 곁엔지 나무를 찍어다가 화톳불을 피우고, 쪼그리고 앉아서 불을 쪼인다. 화씨 100도를 오르내리는 요즈음의 혹서에 불을 쪼인다는 것부터 정말 기경이다.

 

4. 단군천신지위

 

화톳불에 얼마쯤 몸을 녹인 우리는 다시 굴 안으로 순력하다가, 서편 그윽한 돌벼래 위에 정면 남향으로 세 분 위패를 모신 것을 발견하였다. 왼편 조금 적은 위패는〈남무환웅천왕지위〉라 썼고, 중앙은〈남무단군천신지위〉라 하였고, 오른편은 또다시〈남무환웅천왕지위〉라 쓰여 있다. 중앙과 우편은 위패의 크기와 솜씨가 같고, 좌편의 것은 조금 적을 뿐만 아니라, 수법이 졸렬한 것으로 보아, 덧붙이기로 뒤에 모신 것을 짐작하겠다. 우리는 의논이라 한 듯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낮추 낮추 고개를 숙이었다. 나는 만감이 전신에 소용돌이를 치며 고개를 다시 쳐들 수가 없었다. 약자로, 잔손으로 아버지 앞에 엎드린 것이다. 무안하고, 얼없고, 부끄럽고, 무섭고……해서, 숙인 이 고개를 감히 들 수가 없는 것이다.

 

물적 유산은 그만 두자. 그 위대한 문화적 유업―고구려와 신라에 와서 찬란한 탈목의 색과 복욱한 경세의 향을 발하던 그 위대한 문화적 유업이 막상 세상을 흔동할 대과를 맞으려 할 중대시기에 지니지 못하고 조잔과 영락에 맡기었으니 얼마나 황공한 일. 이런 잔손은 대 천세계를 샅샅이 둘러보아도 그 유례와 비슷한 경우를 찾을 수 없으리라. 지옥겁과 도탄고를 열 만 번 더 치르고 더 겪어도 이 죄를 다 싹 치지 못하리라. 참회의 불 채찍이 양심을 후려갈기매,

 

‘인제는 다시, 인제는 다시!’

 

열 번, 스무 번, 골 백 번, 잘 천 번 줄 항복을 하고, 맹서 맹서 하였다. 무슨 낯으로, 무슨 염의로, 무슨 주제로 여기 온고, 올 생의라도 하였던고? 하도 기막히고 답답하기에 집안 어른을 뵈오려 온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지니신 한배님을 찾아온 것이다. 그 뼈가 내 뼈든 뼈인들 아니 저리시며, 그 피가 내 피든 핏줄인들 아니 당기시랴. 역정도 나시지만 그래도 눌러보시리다. 괘씸도 하시지만 그대로 거두어 주시리라. 미웁기도 하시지만, 그래도 엇들고 받들어 주시리라. 두 팔을 벌리시고 오라, 오라! 부르신지 오래인지 모르리라. 맘을 졸이시며 왜 안 오나, 왜 아니 오나! 바라신지 오래인지 모르리라. 억천만겁을 윤회한 들 임 주신 뼈와 피야 가실 줄이 있으랴. 아아, 염통이 뛴다. 고동하는 이 가슴에 임의 손을 얹어 보소서.

 

이 자식 이 모양이

얼마나 미우실까

이 새끼 요 꼬라지

얼마나 화나시리

 

벌역이 꼭지를 잡는 듯

부들부들 떨린다.

우레가 소리친다

벼락이 내리신다

 

번개의 불 채찍이

더럽힌 몸 바숴내네

돌아서 울으시는 양

훌쩍 소리 들린다.

 

임에게 올리올 것

향불도 차비 않고

임에게 드리올 것

제물도 없사외다

 

신물로 이 피 올리니

반기실 줄 아옵네.

잔 사설 긴 푸념을

다 그만 두렵니다

 

열두겹 쌓인 한을

사뢰자니 목이 메네

이 안을 데미다 보시니

두 말할 줄 있으랴.

 

벙어리 냉가슴을

임께와도 앓단 말이

흉장을 두드리매

솟아나니

 

피 눈물이

이어대 두견화 피옵거든

저만 여겨 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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