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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중광터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12-07-18

[단독] 대종교 중광터 103년 만에 최초로 발견
육당 최남선 유품에서 발견한 나철의 친필 ‘중광가’에서 밝혀져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1864~1916)이 1909년에 중광(重光: 다시 세움)한 대종교 중광터가 103년 만에 최초로 발견됐다.

현재 대종교 관계자와 국학 연구자들에 의하면 “나철은 1909년 음력 1월 15일에 오기호, 강우, 유근 등 10여 명과 함께 서울 북부 재동 취운정 아래 6간 초가집 북벽에 단군의 신위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올리며 대종교를 중광했다”고 밝히고 있다.

나철이 태어난 전남 보성군 벌교읍 생가는 복원되고 선양사업이 진행된 반면에 대종교가 중광한 곳은 현재 어느 곳인지 기념비조차 세워져 있지 않은 상태다.

코리언스피릿은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장으로부터 대종교가 중광한 주소가 정확히 기재된 나철의 유품 '중광가'를 단독으로 입수했다.

   
▲ 최남선 유품에서 발견된 나철의 친필 중광가 머리말을 보면 ‘가회동 14번지 이봉춘 현거(嘉會洞 十四番地 李逢春 現居)’라고 장소가 정확히 기재된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자료=조준희 소장)

조 소장은 본지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최근 미국에 거주하는 육당 최남선의 손자 최학주 씨가 조부의 유품 가운데 나철의 친필 ‘중광가’를 전문 학자에게 공개하면서 미궁에 빠져있던 나철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최학주씨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선대의 서궤에서 나철의 유품인 ‘이세가(離世歌)’ ‘순명삼조(殉命三條)’ ‘중광가(重光歌)’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 자료가 나철의 친필본인지에 대해 처음으로 연구한 서지학 전문가 정욱재 우송대학교 초빙교수는 "2011년 11월 23일 한국을 방문한 최학주 씨를 만나 이 자료를 직접 살펴볼 수 있었다"라며 "먼저 이 자료가 보관되어 있던 서궤는 최남선이 평생에 모았던 장서를 보관하였던 자택에서 나왔다는 점과 현재 전해지고 있는 나철의 친필과 발견된 자료를 비교해본 결과 필체와 사용된 용지가 서로 동일하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이와 같은 연구를 바탕으로 ‘나철 친필본의 출현과 의의‘라는 제목으로 역사문제연구 제27호에 게재했다.

나철은 1916년 음력 8월 15일에 죽음을 앞두고서 남긴 ‘중광가’ 47장을 보면 “기유(己酉)해 상(上)보름 첫새벽에, 천조신위(天祖神位) 받들고 제(祭)행하며 도(道)펴니, 이날 경절(慶節) 거듭빛 거듭빛 잊지마세. 백악하(白嶽下) 취운전(翠雲前)에 육간(六間)띄집 잘있나”라고 회상했다. 조 소장은 ‘‘취운전 육간띄집’이란 ‘취운정과 그 아래 중광했던 6간 초가집’을 함축한 것이다“고 설명했다.

   
▲ 홍암 나철은 1909년 음력 1월 15일에 단군의 신위를 모시고 대종교를 중광했다. 그 터가 최근 최남선 유품에서 발견된 나철의 친필 중광가를 통해 분석한 결과 현재 (재)대한불교조계종 안국선원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사진=조준희 소장]

기존의 중광가와 달리 나철 친필 중광가에선 머리말 윗부분에 ‘가회동 14번지 2동 이봉춘 현거(嘉會洞 十四番地 李逢春 現居)’라는 주소가 적혀 있는 것이 발견된다.

조 소장은 “1916년에 나철이 남긴 주소는 1917년 일제시대 등기부등본인 ‘경성부관내지적목록’ 자료를 통해 비교한 결과 이봉춘이 거주한 것이 동일했다”며 “1927년에는 14-1번지로 바뀌었고 해방 이후 여러 사람이 살다가 2001년 (재)대한불교조계종 안국선원이 인수하면서 지상 4층 건물로 신축된 상태임을 현지 답사로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종교 중광터가 현재 불교의 중심지로 바뀐 사실은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가 없다”며 “이곳은 북촌 한옥마을로 외국 관광객들의 방문도 높은 점을 볼 때 앞으로 표지석 설치를 통해 단군과 나철의 위상이 함께 알려졌으면 바란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 근대 국학의 선각자 ‘홍암 나철’

   
▲ 충남 천안시 목천읍 한민족역사문화공원에 자리한 홍암 나철 동상(사진=국학원)
나철은 1864년 전남 보성 벌교읍의 양반가에서 태어나 과거에 급제해 벼슬이 부정자(副正字)에 이르렀다. 그는 1905년에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할 당시 조약에 찬성한 박제순, 이완용, 권중현 등 5명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고 규정에 암살을 기도했다.

그러나 거사 직전에 암살 탄로가 나 신안군의 지도에 유배되고 만다. 이후 나철은 단군신앙을 만나 국학자로 바뀌게 된다.

1909년 음력 1월 15일에, 나철은 오기호, 강우, 유근 등 10여명과 함께 서울 북부 재동 취운정 아래 6간 초가집 북벽에 단군의 신위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하며 ‘단군교포명서’를 공포했다.

단군을 교조(敎祖)로 받들고 한민족 구심점으로서의 기치를 내걸은 대종교는 이 날을 중광절로 기리며, 청산리대첩을 비롯한 항일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선어학회 활동 등으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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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ikoreanspirit.com/news/articleView.html?idxno=33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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