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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마니산 참성단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22-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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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산 참성단.jpg

[마니산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일원]

 

마니산 참성단의 역사와 제천보본

 

강화 마니산(摩尼山) 참성단(塹城壇)은 국조 단제(檀帝)께서 직접 명하여 제단을 쌓게 하시고 손수 제천보본(祭天報本)의 전통윤리를 수범(垂範)하신 곳이다. 우리 민족과 하늘의 연결고리 구실을 해주던 천지인 합일(天地人合一)의 원리를 간직한 제천단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적 유적으로 그 가치성은 무한하다.

 

먼저 마니산은 "머리산(마리산)"이란 뜻으로 숭고하고 거룩한 성산임을 상징한다. 문헌에 마리산(摩利山) 또는 두악(頭岳)으로 기록돼 있으며,《세종실록지리지》에도 마리산으로 적혀 있다. 그 뒤에 불교문화의 영향을 받아 마니산으로 바뀌었으나 그 "니(尼)"자도 석가모니나 공자를 뜻하는 중니(仲尼) 등으로 성자를 지칭할 때 끝에 붙여진 것으로 성스러운 산이란 뜻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강화 사람들은 여전히 마리산으로 부른다. 마니산의 행정구역은 강화 남단인 화도면(華道面)에 속하며, 산의 높이는 469m로 강화군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산세가 가파르고 주산로에는 918개의 계단이 놓여 있을 만큼 오르내리기가 쉽지만은 않다.

 

마니산 참성단은 개국 51년(戊午)에 축성되어 3년 뒤인 개국 54년(辛酉) 3월에 단제께서 직접 이곳에 임하시어 천제를 받드셨다고 한다. 개국기원이 서기전(B.C.) 2333년 무진(戊辰)년이므로 참성단을 쌓은 해는 서기전 2283년이 된다. 제단은 원방각의 형태로 조성되어 우리 민족의 고유사상인 천지인(天地人)사상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신단실기》에 동사(東史)를 인용하여 "제단은 17자인데, 돌로 쌓아서 위는 모나게 아래는 둥글게 만드니 사방이 각각 6자 6치이며, 아래는 각각 15자로 둘려 있다. 혹 말하기를, "마니산(摩尼山)은 강과 바다의 모퉁이로서, 땅이 한적하고 깨끗하고 조용하고 깊어서, 신명(神明)한 자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지내는 자리를 만들어서 상제께 제사지낸다."하고, 또 말하기를, "하늘은 음(陰)을 좋아하고 땅은 양(陽)을 좋아하기 때문에 단(壇)을 반드시 물 가운데 있는 산에 설치했고, 위가 모지고 아래가 둥근 것은 땅과 하늘의 의리이다."라고 했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도 고려 고종 46년에 교서랑 경유(校書郞 景瑜)가 말하기를 "대궐을 마니산에 세우면 가히 나라 운수를 늘인다"하여 임금의 명령으로 이궁(離宮)을 산 남쪽에 세웠다고 전한다. 또한 고려가 고종 19년(1232)에 강화로 천도하여 40년간이나 항몽(抗蒙)투쟁을 계속하면서도 강화 문화를 꽃피웠다는 것은 강화가 단순한 섬이 아니라 민족의 영성이 깃든 신명한 곳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역대로 계승되어 내려오면서 제단을 보수하였고 제천의식(祭天儀式)도 끊이지 않았다. 조선조 인조(仁祖) 17년(1639)에 제단을 고쳐 쌓았고, 숙종 26년(1700) 5월에 다시 보수하고 강화유수 최석항(崔錫恒)이 중수비(重修碑)를 세우니 참성단 동쪽 조금 밑에 현존해 있다.

 

참성단은 단순한 제단이 아니고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될 수 있는 바로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념이 서린 천단(天壇)으로서 천지신명의 감응을 얻고 근본에 보답하는 보본의 윤리를 깨우쳐 주는 신령스러운 곳이다. 예전에 이 마니산 일대는 고가도(古加島)라는 섬으로 이곳에는 외적을 막기 위해 군병을 두둔시켰으며 삼랑성(三郞城)이 쌓여진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한때(1437년)는 역관(曆官)을 파견하여 측우기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마니산 바로 앞바다 강화만(江華灣)은 세계에서 간만(干滿, 썰물과 밀물)의 차가 가장 심한 곳으로 온 바다 조수(潮水)의 기점이라고 하는 대자연의 신비로움을 간직한 곳이다. 참성단이 백두산과 한라산의 정중앙에 위치함도 예사로 넘길 일이 아니라고 본다.

 

마니산 민족 성화 전수사적(傳授事蹟)

 

광복과 더불어 우리 민족사에 기록돼야 할 역사적 사실이 있으니 이는 바로 마니산 성화전수 사적이다.

개천 4403년(1946) 광복 제1주년기념 축하행사의 일환으로 서울의 세 명산인 남산 북악 안현(안산)에서 3일간의 봉화제전(烽火祭典)을 거행하였는데 그 불씨를 대종교에서 전수받아 세 곳의 횃불을 지폈다. 그 당시 광복절 전야(前夜) 오후 6시에 대종교 천진전에서 단애종사(檀崖宗師―尹世復 道兄)가 채화(採火)하여 성화전송단 대표 손기정(孫基禎)씨를 통하여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白凡 金九)선생에게 전송되어 남산에 마련된 봉화대에 점화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 횃불을 민족성화로서 보본의 역사성이 깃든 제천단인 마니산 참성단으로 옮겨 전수시키기로 하고, 그 해 10월 3일(음력) 개천절을 기해 그날 아침 6시에 대종교총본사에서 성화전수식을 거행하고 마라톤선수 함기용(咸基鎔)에 의해 마니산으로 전송되었다. 당시 민정장관인 민세 안재홍 대형(民世 安在鴻 大兄)이 이를 받아 점화함으로써, 전국민의 축전(祝典)으로 제천의식을 성대히 봉행하였다.

 

이로써 보본의식과 숭조(崇祖)의 정신을 앙양하고 민족전통과 정체성 회복에 횃불을 들었건만, 반세기가 넘는 오늘날까지 외래사조(外來思潮)에 "얼"을 잃어버린 채 우리 민족의 성화전수 내력조차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날 남북한을 통해서 마니산 참성단처럼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고고학적 유적이 다시 없음을 감안할 때 사적 제136호로 안도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럽기 한량없다. 어찌하여 남대문[崇禮門]이 국보 제1호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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