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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인물

"대종교, 하늘 땅 사람"이 하나 되는 생명의 종교

역사인물

위당 정인보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08-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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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당 정인보(鄭寅普, 1893∼1950)

 

자는 경업(經業)이며, 호는 담원(薝園)·미소산인(薇蘇山人)·위당(爲堂) 등을 썼고, 서울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외삼촌 서병수(徐丙壽)를 통해 이건방(李建芳)의 휘하에서 양명학 등을 수학하였다. 대종교의 비밀결사인 귀일당(歸一黨) 요원으로, 1913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신채호(申采浩)·문일평(文一平) 등과 함께 대종교계열의 단체인 동제사(同濟社)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그의 역사정신의 핵인 ‘조선얼’은 이러한 정신에서 배태된 것이다.
1923년부터 연희전문의 전임이 되어 한문학과 조선문학을 강의하였으며,《동아일보》·《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때《조선고전해설》(1931)·《양명학연론(陽明學縯論)》(1933)·《오천년간 조선의 얼》(1935) 등을《동아일보》에 연재하여 한국사에 대한 관심과 자긍심을 환기시키고 주체적인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1935년에는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계기로 안재홍(安在鴻) 등과 함께《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교열·간행하는 등 국학운동을 주도하였고, 조선 후기 실학연구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일제의 내선일체(內鮮一體)정책에 따라 조선어강좌가 폐지되자 1938년 연희전문을 사임하고 전북 익산군에서 은거 중 8 ·15광복을 맞이하였다.
8 ·15광복 후에는 남조선 민주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나 곧 탈퇴하고 대종교 계열의 학교인 국학대학의 초대학장을 지냈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 후 초대 감찰위원장이 되었으며, 이듬해 4월 장관 임영신이 관련된 독직사건의 처리를 두고 이승만 대통령과 마찰을 빚어 사직,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1950년 6 ·25전쟁 때 북한군에게 피랍되었다. 1990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실심을 강조한 양명학 연구의 대가였으며 한민족이 주체가 되는 역사체계 수립에 노력한 역사학자였다. 저서에《조선사연구》·《양명학연론》이 있고 1983년에 연세대학교출판부에서《담원 정인보 전집》이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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