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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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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22-04-22

[대종교 동1도구 관할]

 

성지 백두산

 

1. 명칭고찰

 

우리나라에서는 '백두산'으로, 중국에서는 '장백산'으로 통칭된다. 백두산의 명칭 유래는, 백산(白山)이라는 산이름이 멀리서 바라보면 흰 독을 엎어 놓은 것 같은 그 산정(山頂)의 모습에서 유래했다고 한다.(성해응의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

 

"…백두산은 동북쪽 여러 산의 조상이다. 웅장하고 두텁고 넓고 커서 천 리가 한 빛으로 푸르다. 홀로 그 꼭대기는 흰 항아리를 높은 도마 위에 엎어 놓은 것과 같아서, 이 때문에 이름을 백두(白頭)라고 했다." [와유록(臥遊錄, 조선 후기에 편찬된 기행 시문 선집)]

 

또한 산이 극히 높아서 산마루에는 사계절 언제나 빙설이 희게 덮혀있기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 이라고도 전한다.(이유원의 '임하필기(林下筆記)')

 

그러나 백두산이 명칭이 단순히 산머리가 희다는데서 유래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먼저 그 명칭의 다양한 이명(異名)에서도 백두산 명칭에 대한 정신적 가치의 중요성을 확인 할 수 있다. 백두산에 대한 대표적인 명칭과 기록된 문헌을 살펴보면, 불함(不咸)[산해경], 개마(蓋馬)[후한서], 도태(徒太)[위서(魏書)], 태백(太白)[古記], 백산(白山)[括地志], 장백(長白)[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원일통지(元一統志)·요지(遼志)] 등이다.

 

그러면 백두산이 위와 같은 산명(山名)에 나타나는 정신적 의미는 무엇일까. 우선 태백산(太白山)과 백산(白山)의 의미를 살펴 보면 광명사상(光明思想)과 연관됨을 알 수 있다. 먼 옛날 우리 선민(先民)들이 모여 살던 집단 거주지 부근의 고산(高山) 명산(名山)의 이름을 대개 이렇게 광명(光明) 신성(神聖)한 산악(山岳)이라는 의미로 '밝달' 또는 '밝뫼'로 불렀으며 그것이 한자명 '백산(白山)'등으로 옮겨진 것으로 판단된다.(육당 최남선의 '故事通' 참조) 따라서 백산, 태백산은 곧 우리말 이름 '밝달(뫼)', '한밝달(뫼)'를 그대로 한자로 옮긴 것이며, 후일 백두산의 명칭 또한 광명사상(光明思想)과 밀접한 '밝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불함(不咸)'과 '개마(蓋馬)'의 명칭을 주목해 보자. '불함'은 그 음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밝달'의 '밝'이나 또는 '밝음' '붉음'과 통할 수 있다. 이미 최남선의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이나 안재홍의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에서 광명인 '밝'과 '불함'을 같은 의미로 간파하면서 '불함산'이 곧 '백산(白山)' '백악(白岳)'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고어(古語)에 있어서 '화(火)'의 의미인 '불'과 '광명'의 의미인 '밝음'의 의미는 서로 통하는 바가 있으며 '블-ㅂㆍㄹ-발-밝'이 전변(轉變)하여 온 사실을 볼 수 있는 만큼 '불함'의 산명(山名)과 '백(白)'의 산명은 동의이서(同意異書)라고 말한다.

 

끝으로 '도태(徒太)'의 의미 역시 '한밝[太白]'의 뜻을 갖는다. <위서(魏書)>에서는 '도태'의 의미를 위(魏)나라 말로 태백(太白)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고 <신당서(新唐書)> <말갈전(靺鞨傳)>에 적힌 '태백산(太白山)'을 '도태산(徒太山)'이라고도 한다는 내용으로 보아 '도태'라는 말이 다름아닌 우리말 ' 한밝달(뫼)'을 한자로 옮겨 쓴 지방어(地方語)임을 확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백두산의 이명(異名)인 '불함(不咸)', '개마(蓋馬)', '도태(徒太)' 등은 모두 '밝달' '한밝달'의 의미가 한자로 이기(異記)된 것 뿐이며 백두산이 명칭 역시 '밝달'-'백산(白山)'의 과정을 지나 정착된, 고귀한 정신적 의미를 담은 것이라 하겠다.

 

2. 백두산의 정신사적 의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백두산의 정신적 가치는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동방민족 전체로부터 성산(聖山), 영산(靈山)으로 숭봉되어 왔다. <위서>나 <북사(北史)>의 <물길전(勿吉傳)>을 보면 "산중에 호(虎)·표(豹)·웅(雄)·랑(狼)이 있지만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람들이 산위에서 대소변을 보아 더럽히지 못하기 때문에 길을 가는 이들이 모두 다른 물건으로 담아 간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금사(金史)><예지(禮志)>에 의하면 세종(世宗)의 대정(大定) 12년(서기1172년)에, 태백산 즉 장백산(長白山)은 금나라의 '흥왕지지(興王之地)'이니 의례상 존숭하여야 마땅하다는 유사(有司)의 말에 의하여 봉작(封爵) 건묘(建廟)하기로 합의하고, 그해 12월에 산신(山神)을 '흥국영응왕(興國靈應王)'으로 봉하여 산 북쪽에 사당을 지어 제사를 드리게 하였으며, 21년이 지난 장제(章帝)의 명창(明昌) 4년 10월에는 다시 '개천굉성제(開天宏聖帝)'로 높이고 옥책(玉冊)·의물(儀物)을 봉헌(奉獻)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편 금나라를 계승한 청나라 때도, 성조(聖祖) 강희(康熙) 16년(1677) 왕족의 내대신(內大臣) 각라오본눌(覺羅吳本訥) 등을 보내 조종발상지지(祖宗發祥之地)로 전하여 오는 이 산을 간심(看審)하게 하였는데, 오본눌(吳本訥) 등은 그 해 5월에 황제(皇帝)의 윤음(綸音)을 가지고 백두산 천지(天池)까지 올라와 봉심(奉審) 예배(禮拜)하고 돌아갔으며,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산을 '장백산지신(長白山之神)'으로 존봉하고 세시(歲時)로 망제(望祭)하게 하며, 강희제(康熙帝)가 친히 송시(頌詩)를 지어 바쳤다고 전한다.(<청사(淸史)><성조본기(聖祖本記)>권3, <만주원류고(滿洲原流考)> 권1, 권14)

 

우리 <삼국유사(三國遺事)> 등 고사(古史)에 인용되고 있는 <고기(古記)>나 <본기(本紀)>에서 보이는 고조선(古朝鮮), 즉 단군조선(檀君朝鮮)관계 기록에 나오는, 천제(天帝)의 아들인 환웅(桓雄)이 태백산에 하강하여 신시(神市)를 마련하고 다시 웅녀(熊女)와 혼인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을 낳아 고조선의 개국을 보게 되었다는 개국신화(開國神話)는 우리 민족이 천인(天人)과 신인(神人)의 자손임을 나타내는 것이, 그 천(天)·신(神)과 인간과의 인연이 이루어진 곳이 바로 태백산(太白山) 즉 백두산이라는 것을 말하여주고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아득한 옛날부터 백두산이 이 겨레와 인연이 깊은 곳, 우리 민족의 성지(聖地)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특히 <와유록(臥遊錄)>을 보면 백두산 고개밑에는 한줌 흙과 한치 풀도 없고 가다가 소나무·삼나무가 있으되 굳센 바람에 아슬아슬한 바 되어서 모두 낮고 꼬부라졌으며 아랫고개의 북쪽으로 한 시내를 건너 평한 땅 두어수리를 얻으니 나무가 있으되 또한 울퉁불퉁하여 높이가 두어자에 지나지 않는지라. 풍속에 박달(배달나무)이라 부르니 세상에서 단군(檀君)께서 처음 내리신 땅이라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백두산은 신인(神人)께서 처음으로 하강하신 영산(靈山)이요, 또한 신시(神市)를 베풀어 홍제(弘濟)의 대도(大道)를 일깨워 배달나라[檀國]를 건설한 성지(聖地)다. 그러므로 <삼일신고해설(三一神誥解說)>에서는 우리 민족 배달문화의 발상지인 백두산을 '지상천궁(地上天宮)'으로 숭앙하고 있다.

 

3. 백두산을 중심한 국경문제

 

백두산을 중심한 남북마루는 역사적으로 고조선·고구려·발해의 강역(彊域)과 밀접하다. 이 지역과 관련하여 인접 국가와 국경분쟁이 가시화되기시작한 것은 대륙방면에서 명조(明朝)를 대신하여 청조(淸朝)가 세력을 장악하면서 부터이다. 그 배경은 백두산을 '발상지지'로 인식해 온 청(淸)나라가 조선(朝鮮)과 국경선상에 위치하게 되므로 본격화된다.

 

청나라는 제4대 성조(聖祖)의 강희(康熙) 16년(서기 1677년)에 백두산 참례(參禮)와 그 이듬해 망제(望祭)의 예(禮)를 시작으로, 강희 24년(서기 1685년)에는 주방협령(駐防協嶺) 늑초(勒楚)를 보내어 재차 백두산 답사를 행하고, 또 측도(測圖)에 능한 야소회사(耶蘇會士)등을 재삼 파견하여 백두산정계비(定界碑)의 건립을 보기에 앞서 서기 1710년에는 '장백산도(長白山圖)'의 완성을 보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 조선과 청나라 양국 민간인 사이 크고 작은 분쟁이 일어나 많은 살상자까지 발생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마침내 서기 1712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 함경감사(咸鏡監査) 이선부(李善溥)와 청나라의 예부(禮部)에서 파견된 목극등(穆克登) 일행 사이에 협의를 거쳐 백두산 천지하(天池下) 분수령상(分水嶺上)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게 된다. 이 정계비가 바로 한(韓)·만(滿) 국경을 확정하는 최초의 기념물이다.

 

그 후 서기 1882년 한·청 두 나라사이에 국경분쟁이 새롭게 대두되면서 새로이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에 대한 내용 검토및 사실 규명이 있었다. 즉 전부터 두만강 건너편 간도지역(間島地域)에 들어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던 우리 농민들과, 새로 만주개발계획에 의하여 이 방면으로 들어온 청국인(淸國人)들과의 분쟁 알력이 생기고, 청나라 지방관리들은 '토문강(土門江)'서북지역을 점령 개간하는 우리 주민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러한 청나라 관리들의 태도와 입주청인(入住淸人)들의 행동이 점차 심각해지자 우리 주민들은 문제의 해결을 지방관부(地方官府)에 공식으로 호소하게 된 것이다. 호소의 중심은, 분수령정계처(分水嶺定界處)에서 발원(發源)하는 것은 토문강이요, 두만강이 아니므로, 우리 땅인 이서(以西) 이북(以北) 지역에서 농사짓는 우리 주민에 대해 청(淸)측이 왈가 욀부하는 것은, 경계선이 되는 토문강을 우리의 국내(國內) 강류(江流)인 두만강으로 잘못 인식한데서 온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서기 1886년 우리측 대표인 이중하(李重夏)와 청측 대표인 덕옥(德玉)등이 회령부(會寧府)에 만나, 우리 측의 주장이 합당하다는 결론하에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松花江)의 지류(支流)임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청나라는 이 일이 있은 후에도 간도지역에 대한 권리를 수시로 주장하였으나 우리는 그들 주장의 부당함을 내세워 간도지역에 대한 영토관리와 주민보호에 노력하였다.

 

급기야는 일제침략기에 간도지역이 남만철도(南滿鐵道) 부설권(敷設權)과 흥정거리가 되기도 하였지만,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에서 파생되는 이 간도(間島)의 영토 문제는 아직도 한(韓)·중(中) 양국간의 공식타결을 보지 못한 채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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