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물
단애(윤세복)종사
작성자 : 관리자
등록일 : 2009-10-02
대종교 제3세 도사교(都司敎∼교주). 교단에서의 호칭은 단애종사(檀崖宗師), 본명은 세린(世麟),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상원(庠元). 1881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출생, 10여년 간 한학을 공부한 다음 고향의 신창소학교(新昌小學校)와 대구의 협성중학교(協成中學校)에서 5년동안 교편을 잡았으며, 1906년부터 3년 동안 대구에서 수학(數學)을 공부하였다. 1910년 12월 서울에 올라와 대종교에 입교한 뒤 다음해 정월 시교사(施敎師)로 선임되자 가산 수천석을 정리하여 남만주로 망명하여 사재를 들여 환인현(桓因縣)에 교당을 설립하여 시교에 힘쓰는 한편, 환인현에 동창학교(東昌學校), 무송현에 백산학교(白山學校), 북만주 밀산당벽진에 대흥학교(大興學校), 영안현 동경성에 대종학원(大倧學園)을 설립 또는 경영하여 5년 동안 민족교육에 진력하였다. 1916년 무송현 등 여러 곳에 교당을 설립하여 7,000여명의 교인을 새로이 모으는 한편, 대종교를 모태로 하는 흥업단(興業團)·광정단(匡正團)·독립단 등의 단체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에 헌신하였다. 선생의 활동영역은 대종교 포교활동이 바로 독립운동에 직결됐고 수십개의 교당은 바로 독립운동기지화했다. 따라서 대종교는 포교와 항일투쟁과 민족교육이 삼위일체를 이루었다. 1918년 10월 무력항쟁을 선언한 무오(戊午)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해외 독립운동지도자 39인 명의). 1924년 제2세 교주인 무원 김교헌 종사의 유명을 받고 영안현 남관에서 교통(敎統)을 이어 제 3세 도사교(敎主)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취임 후 4년 만인 1928년에 일본군부의 압력에 눌려 장쭤린(張作霖)이 체결한 이른바 삼시조약(三矢條約)의 부대조항에 의하여 대종교 포교금지령이 내려지자 부득이 총본사를 밀산 당벽진으로 옮기는 수난을 겪었다. 이 금지령은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요인 박찬익(朴贊翊)의 외교활동으로 1930년 난징(南京)의 국민정부가 봉천·길림·흑룡강·열하 등의 동북4성에 대한 대종교 해금령을 내림으로써 한번 해제되었다. 그러나 다음해인 1931년부터 일본군의 만주침략이 격심해지면서 교단활동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동·서·북 3개의 도본사(道本司)가 해체되었고, 1930년에는 서울에 잇는 남도본사마저 폐쇄되는 등 극히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무릅쓰고 교세확장을 위하여 분기할 것을 결의하고, 1934년 영안현 동경성으로 총본사를 옮겨 한배검을 모신 천진전(天眞殿)을 세우는 한편, 대종학원을 설립하고 하얼빈에 선도회(宣道會)를 설치하여 대대적인 교적간행사업(敎籍刊行事業)을 추진하면서 천진궁의 건축을 서둘렀다. 이러던 중 1942년 교단간부들과 같이 일본경찰에 붙잡혀 무기형을 선고받았는데, 이 사건이 바로 임오교변(壬午敎變)이다. 대종교인이 태반이었던 조선어학회 사건과 때를 같이 했음은 일제가 한국의 민족정신과 언어말살을 획책한 2대 사건이었다. 이 몸이 옥사한 뒤 유해를 출송하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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