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외성지(남)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
작성자 : 관리자
등록일 : 2008-09-20
[대종교 남1도구 관할] 옛날에 단군이 수도를 평양에 정했다가 이곳에 옮기고 수천 년간 다스렸다고 전한다. 구월산 남쪽 기슭의 맑은 시내인 구월천을 따라 내려가면 신천군 초리면 달천리에 달천온천이 있다. 달천온천 동북쪽에 문화유씨 유릉(선조묘)이 있고, 그 부근에 유응두(柳應斗)가 자주 찾던 묵방사(墨坊寺)가 있었는데, 유릉을 지키는 묵방재로 변했다 한다. 유응두는 당대 석학으로《단기고사》를 중국에서 처음 입수했던 이로 잘 알려져 있다. 구월산에는 단군에 관한 영적이 곳곳에 있는데, 환인․환웅․단군 세 성인을 제사지내는 ‘삼성사’, 단군이 올라가 나라의 지리를 살폈다는 ‘단군대’가 있다. 단군대에서 내려와 산 동쪽 신천군 용진면 패엽리에 신라 시대 창건한 패엽사가 나온다. 패엽사에서 내려오면 삼성리가 있고, 삼성리를 지나면 전동(殿洞)이란 작은 마을이 있다. 전동의 유래는 동내에 삼성사 삼성전(三聖殿)이 있어서인데, 옛날에는 성당리(聖堂里)라 했다. 이 전동에서 서쪽으로 4km 지점에 앉은 듯이 슬며시 솟은 청수한 토산이 삼성사가 있는 삼성봉이다. 1947년에 조성된 구월저수지(면적 3.18㎢)가 이곳에서 남쪽 약 6km지점에 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조 태종 당년에 삼성사를 철폐하고, 평양 단군묘에 합치하자 황해도 내에 악질이 만연했다. 성종 때에 이르러 단군사의 소재와 사당을 옮긴 이유 등을 조사하게 되자 임진년 2월 황해도 관찰사 이예의 계(啓)에, “구월산 사우가 패엽사 서쪽, 대증산 임불찰 뒤에 있었는데 그 뒤 절 아래의 소봉에 옮기고 또 소증산으로 옮겼다 하였으며, 삼성당 내의 감실 모양을 그린 것을 초해 보면, 단인천왕은 남향이오, 단웅천왕은 서향이오, 단군천왕 동향으로 함께 위패를 모셨습니다. 속전에 옛날에는 모두 목상이었는데, 태종조에 하륜이 여러 사당의 목상을 혁파할 것을 건의하여 삼성의 목상도 또한 예(例)에 따라 파하였다 하며, 의물(儀物)의 설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하였다. 조선조에서 최후에 삼성사를 중수한 것은 1902년으로 일제 강점 이후 허물어져가던 삼성사를 다시 복원한 것은 그 뒤 14년이 지나서다. 1916년 음력 8월 4일 나철은 김두봉을 비롯한 시봉자 6명을 데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8월 6일 삼성사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삼성사를 복원한 나철은 15일 오전 1시부터 2시 반까지 1시간 반에 걸쳐 천제를 지냈다. 그리고 ‘하늘을 위해, 인류를 위해, 대종교를 위해’ 밤 11시 30분 수행의 최고 경지인 폐기법으로써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삼성사는 나철의 순명 조천(朝天) 다음해 군에서 공매하여 천도교 교당을 짓는데 활용되고 그 터만 남고 말았다 한다. 외래사상의 난무 속에 정체성을 상실해 가는 요즘, 민족 성지 숭령전과 삼성사의 역사적․종교적 의미를 새기고 국난극복과 조국통일의 힘찬 원동력을 찾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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